4. ghoṭamukhasuttaṃ (MN 94-고따무카 경)
5. brāhmaṇavaggo, 4. ghoṭamukhasuttaṃ (MN 94-고따무카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우데나 존자는 바라나시에서 케미야 망고 숲에 머물렀다. 그때 고따무카 바라문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고따무카 바라문은 산책하며 이리저리 걷다가 케미야 망고 숲에 왔다. 그때 우데나 존자는 열린 장소에서 걷고 있었다. 그러자 고따무카 바라문이 우데나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우데나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걷고 있는 우데나 존자를 따라서 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반갑습니다, 사문이여. 여기서 나는 ‘법다운 유행승(遊行僧-떠도는 수행자)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존자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는 여기서 그런 법을 가진 자를 보지 못해서일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우데나 존자는 걸음을 멈추고 거처로 들어간 뒤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고따무카 바라문도 걸음을 멈추고 거처로 들어간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고따무카 바라문에게 우데나 존자는 “바라문이여, 의자들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앉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우데나 존자가 환영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앉겠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초대받지 않고도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고따무카 바라문은 어떤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고따무카 바라문은 우데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반갑습니다, 사문이여. 여기서 나는 ‘법다운 유행승(遊行僧-떠도는 수행자)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존자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는 여기서 그런 법을 가진 자를 보지 못해서일 것입니다.”라고. “만약, 바라문이여, 그대가 나에게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인정하고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거부하고, 내가 말한 것의 의미를 모르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어떻게 이렇습니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나에게 더 되물어본다면, 이렇게 함으로써 여기서 우리가 우정의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데나 존자에게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인정하고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거부하고, 우데나 존자가 말한 것의 의미를 모르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어떻게 이렇습니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우데나 존자에게 더 되물어보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기서 우리가 우정의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문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넷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자입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입니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대의 마음에 듭니까?”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이 사람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도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도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는 이 사람이 저의 마음에 듭니다.”
“바라문이여, 이 세 사람은 왜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자기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자기와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는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자기와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을 주지 않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저의 마음에 듭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두 가지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둘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친밀에 물든 어떤 무리는 자식과 아내를 추구하고, 하녀와 하인을 추구하고, 밭과 대지를 추구하고, 금과 은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바라문이여, 여기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친밀에 물들지 않은 어떤 무리는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하녀와 하인을 버리고, 밭과 대지를 버리고, 금과 은을 버리고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런 이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입니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뭅니다. 여기, 바라문이여, 그대는 자식과 아내를 추구하고, 하녀와 하인을 추구하고, 밭과 대지를 추구하고, 금과 은을 추구하는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친밀에 물든 무리와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하녀와 하인을 버리고, 밭과 대지를 버리고, 금과 은을 버리고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친밀에 물들지 않은 무리 중에서 어떤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을 많이 봅니까?”
“우데나 존자여,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뭅니다. 나는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하녀와 하인을 버리고, 밭과 대지를 버리고, 금과 은을 버리고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보석과 귀걸이에 대한 친밀에 물들지 않은 무리 가운데에서 이런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도 바라문이여, 이제 그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는 이렇게 압니다. ― ‘반갑습니다, 사문이여. 여기서 나는 ‘법다운 유행승(遊行僧-떠도는 수행자)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존자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는 여기서 그런 법을 가진 자를 보지 못해서일 것입니다.’”라고. “우데나 존자여, 참으로 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법다운 유행승은 있다.’라고 저는 여기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데나 존자께서는 이렇게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우데나 존자께서 저에게 간략히 말하고 상세히 분석하지 않은 네 가지 사람에 대해 우데나 존자께서 연민으로 저에게 이 네 가지 사람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고따무카 바라문은 우데나 존자에게 대답했다. 우데나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품행에 얽매이지 않은 자이고, 음식을 받은 뒤에 핥아 먹는 자이고, ‘오시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는 자이고, ‘서시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는 자인데, 주어지지 않은 것과 배당되지 않은 것과 초대되지 않은 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항아리의 가장자리로부터 받지 않고, 그릇의 가장자리로부터 받지 않고, 중간에 문지방이 있는 것, 중간에 몽둥이가 있는 것, 중간에 절굿공이가 있는 것, 두 사람이 먹고 있는 것, 임신부의 것, 젖을 먹이는 여자의 것, 남자에게 안긴 여자의 것을 받지 않고 모여 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개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파리 떼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받지 않고, 어류를 받지 않고, 고기를 받지 않고, 술과 발효주와 발효하여 끓인 것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는 한 집에서 한 입의 음식을, 두 집에서 두 입의 음식을 … 일곱 집에서 일곱 입의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작은 그릇 한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작은 그릇 두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 작은 그릇 일곱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합니다. 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고, … 이레에 한 번 음식을 먹습니다. ― 이와 같은 식으로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의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뭅니다. 그는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생쌀을 먹기도 하고, 부드러운 뼈를 먹기도 하고, 수초를 먹기도 하고, 왕겨를 먹기도 하고, 뜨물을 먹기도 하고, 참깻가루를 먹기도 하고, 풀을 먹기도 하고, 쇠똥을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합니다.
그는 삼베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수의(壽衣)도 입고, 분소의(糞掃衣)도 입고, 나무껍질을 엮은 옷도 입고, 치타 가죽옷도 입고, 치타 가죽 망토도 입고, 꾸사 풀 옷도 입고, 나무껍질 옷도 입고, 나무의 편편한 조각으로 만든 옷도 입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도 입고, 뱀 껍질로 만든 담요도 입고, 올빼미 깃털로 만든 옷도 입습니다.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뽑는 수행을 실천하는 자여서 머리카락과 턱수염도 뽑고, 앉는 것을 거부하는 자여서 똑바로 서기도 하고, 쪼그려 앉는 정진을 실천하는 자여서 쪼그려 앉기도 하고, 가시에 기대는 자여서 가시로 된 침대를 사용합니다.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뭅니다. ― 이와 같은 식의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실천하며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양 도살자, 돼지 도살자, 새 잡는 사람, 사슴 사냥꾼, 사냥꾼, 어부, 도둑, 도둑의 집행자, 죄수, 또는 누구든지 모진 행위를 하는 다른 사람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거나 큰 재력을 가진 바라문입니다. 그는 도시의 동쪽에 새로운 공회(公會)를 짓게 하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거친 가죽옷을 입고 버터와 기름을 몸에 바르고 사슴뿔로 등을 긁으면서 첫째 왕비와 왕실의 바라문 제관과 함께 새로운 공회(公會)로 들어갑니다. 그는 거기서 이어지는 적당하고 황갈색으로 얼룩진 땅에 자리를 만들게 합니다. 같은 색깔의 송아지가 있는 한 마리의 암소의 첫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우유로 왕이 연명합니다. 두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으로 첫째 왕비가 연명합니다. 세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으로 왕실의 바라문 제관이 연명합니다. 네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으로 불에 붓습니다. 나머지로 송아지가 연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황소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젖을 뗀 수송아지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젖을 뗀 암송아지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암염소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숫양들을 도살하라. 제사를 위해서 이만큼의 말들을 도살하라. 제사 기둥을 위해서 이만큼의 나무를 베어라. 제사 풀을 위해서 이만큼의 다르바 풀을 거둬라.’라고. 그러면 그의 하인이나 심부름꾼이나 직원들은 처벌을 두려워하고 무서움을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한탄하면서 준비를 합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스스로 힘든 삶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여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는 사람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신과 함께하고 마라와 함께하고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과 사문-바라문과 함께하고 신과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를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합니다. 그는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고,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냅니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습니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얻습니다. 얻어진 그 믿음을 갖춘 그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재가의 삶이란 압박이고 오염이 많지만, 출가는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온전히 충만하고 온전히 청정하고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범행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해야겠다.’라고. 그는 나중에 적은 재산을 버리거나 많은 재산을 버리거나 주변의 적은 친척을 버리거나 주변의 많은 친척을 버린 뒤에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이렇게 출가하여 비구들의 공부와 생활규칙을 갖춘 그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몽둥이를 내려놓았고, 칼을 내려놓았고, 겸손하고, 연민하고, 모든 생명에게 우정과 동정으로 머뭅니다.
그는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준 것만을 받는 자이고, 준 것만을 바라는 자입니다. 스스로 훔치지 않는 청정한 존재로 머뭅니다.
그는 범행(梵行) 아닌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범행(梵行)을 닦는 자입니다. 멀리 사는 자이고, 저속한 성행위를 멀리 여의었습니다.
그는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자이고, 믿을만하고, 신뢰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고, 세상을 위해 진실을 말합니다.
그는 험담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험담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여기서 들은 뒤 저기서 말함으로부터 이것들의 해체로 이끌지 않고, 저기서 들은 뒤 이들에게 말함으로부터 이러한 해체로 이끌지 않습니다, 이렇게 파괴를 회유하는 자이거나 단결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꾀하고 화합을 즐기고 화합을 만드는 말을 말합니다.
그는 거칠게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침이 튀지 않고, 귀에 즐겁고, 애정이 넘치고, 매력적이고, 예의 바르고, 대중들이 좋아하고, 대중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말합니다.
그는 쓸모없고 허튼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쓸모없고 허튼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적절한 때에 말하고, 진실 되게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합니다. 적절한 때에, 근거를 갖춘, 절제된, 이익되는 말을 말합니다.
1) 그는 씨앗과 초목을 손상하는 행위를 피하고, 2)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자여서 밤에 먹는 것을 삼가고, 규정되지 않은 때에 먹는 것을 멀리 여의고, 3) 춤, 노래, 음악, 관람을 피하고, 4) 화환, 향, 화장품, 몸에 지니는 것, 장식품, 꾸민 상태를 버렸기 때문에 춤, 노래, 음악, 관람, 화환, 향, 화장품, 몸에 지니는 것, 장식품, 꾸민 상태를 피하고, 5) 높고 큰 침상을 피하고, 6) 금과 은을 받는 것을 피하고, 7) 요리하지 않은 낱알을 받는 것을 피하고, 8) 요리하지 않은 고기를 받는 것을 피하고, 9) 여인이나 여자아이를 받는 것을 피하고, 10)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을 피하고, 11) 염소와 숫양을 받는 것을 피하고, 12) 닭과 돼지를 받는 것을 피하고, 13) 코끼리와 소와 말과 암말을 받는 것을 피하고, 14) 밭이나 땅을 받는 것을 피하고, 15) 심부름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16) 상행위를 하는 것을 피하고, 17) 저울추를 속이고, 사기를 치고, 치수를 속이는 것을 피하고, 18) 뇌물을 주고, 속이고, 사기 치고 정직하지 않은 것을 피하고, 19) 절단, 살상, 포박, 노상강도, 약탈, 폭행을 피합니다.
그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가사와 내장을 유지하기 위한 탁발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들만 가지고 갑니다. 예를 들면 날개 가진 새는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오직 자기의 양 날개를 옮기며 날아갑니다. 이처럼 비구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가사와 내장을 유지하기 위한 탁발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그가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들만 가지고 갑니다. 이런 성스러운 계온(戒蘊)을 갖춘 그는 안으로 피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수(受)를 붙잡지 않습니다. 안근(眼根)을 단속하지 않고 머물면 간탐(慳貪)과 불만(不滿)과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흘러들어 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단속을 위해 실천합니다. 안근(眼根)을 보호하고, 안근(眼根)에서 단속합니다.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 신(身)으로 촉(觸)을 닿으면서 …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수(受)를 붙잡지 않습니다. 의근(意根)을 단속하지 않고 머물면 간탐(慳貪)과 불만(不滿)과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흘러들어 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단속을 위해 실천합니다. 의근(意根)을 보호하고, 의근(意根)에서 단속합니다. 이 성스러운 기능의 단속을 갖춘 그는 안으로 뿌려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대가사와 발우와 가사를 지닐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똥과 오줌을 눌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갈 때도-설 때도-앉을 때도-잠잘 때도-깨어있을 때도-말할 때도-침묵할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합니다.
이런 성스러운 계의 무더기를 갖추고, (이런 성스러운 만족을 갖추고) 이런 성스러운 기능의 단속을 갖추고, 이런 성스러운 사띠와 삼빠자나를 갖춘 그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합니다.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오후에 다리를 교차하고, 몸을 곧게 뻗치고, 콧구멍 주위에 사띠를 준비한 채 앉아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을 버린 뒤에 간탐에서 벗어난 심(心)으로 머물고, 간탐으로부터 심(心)을 청정케 합니다. 진에(瞋恚)의 결점을 버린 뒤에 분노하지 않는 심(心)으로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머물고, 진에의 결점으로부터 심(心)을 청정케 합니다. 해태-혼침을 버린 뒤에 해태-혼침 없이 광명상(光明想)을 가지고 사띠와 삼빠자나를 갖춘 자로 머물고, 해태-혼침으로부터 심(心)을 청정케 합니다. 들뜸-후회를 버린 뒤에 휘저어지지 않아 안으로 가라앉은 심(心)으로 머물고, 들뜸-후회로부터 심(心)을 청정케 합니다. 의심을 버린 뒤에 의심을 건너 유익한 법들에 대해 불확실함을 가지지 않은 자로 머물고, 의심으로부터 심(心)을 청정케 합니다.
그는 혜(慧)를 무력하게 하는 심(心)의 오염원인 이런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서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합니다[전생 기억]. 그는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진화[소멸]하는 여러 겁, 세계가 퇴보하는[자라나는] 여러 겁, 세계가 진화하고 퇴보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번뇌들의 부서짐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들이 번뇌[루(漏)]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집(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소유의 번뇌[욕루(慾漏)]에서도 심(心)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유루(有漏)]에서도 심(心)이 해탈하고,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에서도 심(心)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면서 남을 괴롭히는 실천을 하지 않아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이다. 스스로 힘든 삶을 살지 않는 자이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자인 그는 지금여기에서 원하지 않는 자, 꺼진 자, 청량한 자, 즐거움을 경험하는 자여서 스스로 성스러운 존재로 머문다.’라고 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