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사무량심] 4. mettāsahagatasuttaṃ (SN 46.54-자(慈)와 함께함 경)
6. sākacchavaggo, 4. mettāsahagatasuttaṃ (SN 46.54-자(慈)와 함께함 경)
한때 세존은 꼴리야에서 할릿다와사나라는 꼴리야의 번화가에 머물렀다. 그때 많은 비구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할릿다와사나에 갔다. 그때 그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탁발을 위해 할릿다와사나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우리가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라고.
그래서 그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갔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심(心)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라고.
도반들이여, 참으로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채우면서 머물라. …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라고. 여기 법을 설함과 가르침의 근본에서 사문 고따마와 우리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습니까?”
그때 비구들은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다. —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면서. 그리고 비구들은 할릿다와사나에서 탁발을 하여 식사를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여기 저희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할릿다와사나에 갔습니다. 그때 저희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탁발을 위해 사왓티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우리가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라고.
대덕이시여, 그래서 저희는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대화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습니다. 대덕이시여, 한 곁에 앉은 저희에게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채우면서 머물라. …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라고.
도반들이여, 참으로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합니다. — ‘오라,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채우면서 머물라. …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물라.’라고. 여기 법을 설함과 가르침의 근본에서 사문 고따마와 우리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습니까?”
그때 저희는 외도 유행승들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부정하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 '우리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면서.”
"비구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도반들이여, 자심해탈(慈心解脫)은 어떻게 닦습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 도반들이여, 비심해탈(悲心解脫)은 어떻게 닦습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 도반들이여, 희심해탈(喜心解脫)은 어떻게 닦습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 도반들이여, 사심해탈(捨心解脫)은 어떻게 닦습니까?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질문을 받은 외도 유행승들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영역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여래거나 여래의 제자거나 여기에서 들은 자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마음을 기껍게 해주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자심해탈(慈心解脫)은 어떻게 닦는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 자(慈)가 함께한 염각지(念覺支)를 닦는다. … 떨침의 과정이고, 이탐의 과정이고, 소멸의 과정이고, 쉼으로 귀결되는 자(慈)가 함께한 사각지(捨覺支)를 닦는다. 만약 그가 만약 그가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과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또는 깨끗함[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할 때 자심해탈(慈心解脫)은 깨끗함[정(淨)]이 궁극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심해탈(悲心解脫)은 어떻게 닦는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 비(悲)가 함께한 염각지(念覺支)를 닦는다. … 떨침의 과정이고, 이탐의 과정이고, 소멸의 과정이고, 쉼으로 귀결되는 비(悲)가 함께한 사각지(捨覺支)를 닦는다. 만약 그가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또는 완전하게 색상(色想)을 넘어서고, 저항의 상(想)이 줄어들고, 다양한 상(想)을 작의(作意)하지 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할 때 비심해탈(悲心解脫)은 공무변처(空無邊處)가 궁극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희심해탈(喜心解脫)은 어떻게 닦는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 희(喜)가 함께한 염각지(念覺支)를 닦는다. … 떨침의 과정이고, 이탐의 과정이고, 소멸의 과정이고, 쉼으로 귀결되는 희(喜)가 함께한 사각지(捨覺支)를 닦는다. 만약 그가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또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할 때 희심해탈(悲心解脫)은 식무변처(識無邊處)가 궁극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사심해탈(捨心解脫)은 어떻게 닦는가? 어디로 이끌고, 무엇이 최상이고, 무엇이 과(果)이고, 무엇이 완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떨침의 과정이고, 이탐의 과정이고, 소멸의 과정이고, 쉼으로 귀결되는 사(捨)가 함께한 염각지(念覺支)를 닦는다. … 떨침의 과정이고, 이탐의 과정이고, 소멸의 과정이고, 쉼으로 귀결되는 사(捨)가 함께한 사각지(捨覺支)를 닦는다. 만약 그가 만약 그가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과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또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지혜를 가진 비구가 더 높은 해탈을 꿰뚫지 못할 때 사심해탈(捨心解脫)은 무소유처(無所有處)가 궁극이라고 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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