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ādhipateyyasuttaṃ (AN 3.40-지배 경)
4. devadūtavaggo, 10. ādhipateyyasuttaṃ (AN 3.40-지배 경)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지배가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자신의 지배, 세상의 지배, 법의 지배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자신의 지배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 ‘나는 옷을 원인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 거처를 원인으로 … 이 세상과 저세상을 원인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하물며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에 빠져 있다. 괴로움에 빠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소유의 삶을 포기하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소유의 삶이나 그보다 더 악한 원함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적절하지 않다.’라면서,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 ‘나는 게으르지 않아 열심히 정진하고, 사띠는 확립되어 잊히지 않고, 몸은 진정되어 흔들리지 않고, 심(心)은 집중되어 삼매를 닦을 것이다.’라고.
그는 오직 자신을 지배한 뒤에 불선(不善)을 버리고 선(善)을 닦는다. 결점 있는 것을 버리고 결점 없는 것을 닦는다. 청정한 자신을 유지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자신의 지배라고 불린다.
(*) (MN 17-깊은 숲속 외딴 거처 경)에서는 옷-탁발 음식-거처-약품을 원인으로 출가하지 않았다고 나타남.
(**) (MN 29-심재(心材) 비유의 큰 경), (MN 30-심재(心材) 비유의 작은 경), (MN 67-짜뚜마 경), (AN 3.40-지배 경), (AN 4.122-파도 경), (SN 22.80-탁발 경)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세상의 지배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 ‘나는 가사를 원인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 거처를 원인으로 … 이 세상과 저세상을 원인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하물며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에 빠져 있다. 괴로움에 빠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이렇게 출가한 내가 소유의 생각을 떠오르게 하거나, 분노의 생각을 떠오르게 하거나, 폭력의 생각을 떠오르게 할 수 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크다. 그리고 큰 세상에는 신통력을 가졌고, 천안(天眼)을 가졌고, 남의 심(心)을 아는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들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으면서 심(心)으로 심(心)을 꿰뚫어 안다. 그들도 나를 이렇게 알 것이다. ― ‘보시오, 존자들이여,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이 좋은 가문의 아들은 악한 불선법들과 섞여서 머뭅니다.’라고. 신통력을 가졌고, 천안(天眼)을 가졌고, 남의 심(心)을 아는 신(神)들도 있다. 그들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으면서 심(心)으로 심(心)을 꿰뚫어 안다. 그들도 나를 이렇게 알 것이다. ― ‘보시오, 존자들이여,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이 좋은 가문의 아들은 악한 불선법들과 섞여서 머뭅니다.’’라면서,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 ‘나는 게으르지 않아 열심히 정진하고, 사띠는 확립되어 잊히지 않고, 몸은 진정되어 흔들리지 않고, 심(心)은 집중되어 삼매를 닦을 것이다.’라고.
그는 오직 세상을 지배한 뒤에 불선(不善)을 버리고 선(善)을 닦는다. 결점 있는 것을 버리고 결점 없는 것을 닦는다. 청정한 자신을 유지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세상의 지배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법의 지배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 ‘나는 가사를 원인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 거처를 원인으로 … 이 세상과 저세상을 원인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하물며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에 빠져 있다. 괴로움에 빠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고.
‘‘세존(世尊)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들이 개별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알고 보며 머무는 나의 동료수행자들이 있다. 이렇게 잘 설해진 법(法)과 율(律)에서 출가한 내가 게으름과 방일로써 머문다면, 이것은 나에게 적절하지 않다.’’라면서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 ‘나는 게으르지 않아 열심히 정진하고, 사띠는 확립되어 잊히지 않고, 몸은 진정되어 흔들리지 않고, 심(心)은 집중되어 삼매를 닦을 것이다.’라고.
그는 오직 법을 지배한 뒤에 불선(不善)을 버리고 선(善)을 닦는다. 결점 있는 것을 버리고 결점 없는 것을 닦는다. 청정한 자신을 유지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법의 지배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세 가지 지배다.
“natthi loke raho nāma, pāpakammaṃ pakubbato.attā te purisa jānāti, saccaṃ vā yadi vā musā.
악업을 지은 자에게, 참으로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사람아, 그대의 행위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대가 안다.
“kalyāṇaṃ vata bho sakkhi, attānaṃ atimaññasi.yo santaṃ attani pāpaṃ, attānaṃ parigūhasi.“passanti devā ca tathāgatā ca,lokasmiṃ bālaṃ visamaṃ carantaṃ.
사람아, 선(善)을 마주해서는 자신을 등한시하고
자기에게 악함이 있을 때는 자신을 숨기는 사람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의 고르지 못한 행위를 신도 여래도 본다.
tasmā hi attādhipateyyako ca,lokādhipo ca nipako ca jhāyī.
그러므로 자신을 지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신중하고 선(禪)을 닦는다.
“dhammādhipo ca anudhammacārī,na hīyati saccaparakkamo muni.pasayha māraṃ abhibhuyya antakaṃ,yo ca phusī jātikkhayaṃ padhānavā.so tādiso lokavidū sumedho,sabbesu dhammesu atammayo munī”ti. dasamaṃ.
법을 지배하는 자는 법을 따라 행한다.
진리를 위해 노력하는 성자는 퇴보하지 않는다.
노력을 다하는 자는 마라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여 태어남의 부서짐을 얻는다.
그렇게 그 현명한 자, 세간해(世間解)는
모든 법에 대해 그것에서 생겨나지 않는 성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