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itthāyatanādisuttaṃ (AN 3.62-근본 교리 등 경)[외도의 주장 경(A3:61)]
(7) 2. mahāvaggo, 1. titthāyatanādisuttaṃ (AN 3.62-근본 교리 등 경)
[초기불전연구원] 비구들이여,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다.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스승 등의]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업]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 어떤 것이 셋인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현자에 의해서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근본경전연구회] 비구들이여, 현자들과 함께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고, 더 나아가면 결실 없음으로 정착되는 세 가지 외도의 근본 교리가 있다. 어떤 셋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생의 행위가 원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창조가 원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무인무연(無因無緣)]이다.’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 중에서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생의 행위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생의 행위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존자들은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험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거친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간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원인인 거슬린 심(心)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전생의 행위를 중심에 두면 관심이거나 노력이거나 이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거나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되돌아옴이 없다. 이렇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사실과 믿을만함으로부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띠를 잊고 보호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스스로 법다운 사문이라는 주장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법에 맞는 질책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중에서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창조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창조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존자들은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험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거친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간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거슬린 심(心)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창조주의 창조를 중심에 두면 관심이거나 노력이거나 이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거나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되돌아옴이 없다. 이렇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사실과 믿을만함으로부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띠를 잊고 보호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스스로 법다운 사문이라는 주장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법에 맞는 질책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중에서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무인무연(無因無緣)].’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무인무연(無因無緣)].’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존자들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험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거친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간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거슬린 심(心)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원인도 조건도 없음[무인무연(無因無緣)]을 중심에 두면 관심이거나 노력이거나 이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거나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되돌아옴이 없다. 이렇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사실과 믿을만함으로부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띠를 잊고 보호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스스로 법다운 사문이라는 주장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세 번째 법에 맞는 질책이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현자들과 함께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고, 더 나아가면 결실 없음으로 정착되는 세 가지 외도의 근본 교리가 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이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 내가 설한 법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육계(六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육촉처(六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열여덟 가지 의(意)의 행보(行步)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육계(六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다. 무엇을 연(緣)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이러한 요소가 있다. — 땅의 요소[지계(地界)], 물의 요소[수계(水界)], 불의 요소[화계(火界)], 바람의 요소[풍계(風界)], 공간의 요소[공계(空界)], 식의 요소[식계(識界)]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육계(六界)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이런 육촉처(六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다. 무엇을 연(緣)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촉처(觸處)가 있다. — 안촉처(眼觸處), 이촉처(耳觸處), 비촉처(鼻觸處), 설촉처(舌觸處), 신촉처(身觸處), 의촉처(意觸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육촉처(六觸處)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이런 열여덟 가지 의(意)의 행보(行步)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다. 무엇을 연(緣)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안(眼)으로 색(色)을 보고서 만족을 주는 색(色)으로 다가가고, 불만족[고뇌]를 주는 색(色)으로 다가가고, 평정을 주는 색(色)으로 다가간다. 이(耳)로 성(聲)을 듣고서 … 비(鼻)로 향(香)을 맡고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고서 … 신(身)으로 촉(觸)을 닿고서 …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고서 만족을 주는 법(法)으로 다가가고, 불만족을 주는 법(法)으로 다가가고, 평정을 주는 법(法)으로 다가간다. ‘비구들이여, ‘이런 열여덟 가지 의(意)의 행보(行步)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다. 무엇을 연(緣)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육계(六界)의 붙잡음을 원인으로 모태에 듦이 있다. 듦이 있을 때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있고,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경험하고 있는 자에게 ‘이것은 고(苦)다.’라고 선언하고, ‘이것은 고집(苦集)이다.’라고 선언하고, ‘이것은 고멸(苦滅)이다.’라고 선언하고, ‘이것은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고성제(苦聖諦)인가? 태어남[생(生)]도 괴로움이고, 늙음[노(老)]도 괴로움이고, 죽음[사(死)]도 괴로움이다.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도 괴로움이다. (재미없는 것들과 함께 엮이는 것도 괴로움[원증회고(怨憎會苦)]이고, 즐거운 것들과 갈라지는 것도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구부득고(求不得苦)]이다. 간략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이 괴로움이다[오취온고(五取蘊苦)].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성제(苦聖蹄)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집성제(苦集聖諦)인가?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들이, 행(行)들을 조건으로 식(識)이,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육입(六入)이,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취(取)를 조건으로 유(有)가, 유(有)를 조건으로 생(生)이,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자라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집성제(苦集聖諦)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멸성제(苦滅聖諦)인가? 그러나 무명(無明)이 남김없이 바래어 소멸할 때 행(行)들이 소멸하고, 행(行)들이 소멸할 때 식(識)이 소멸하고, 식(識)이 소멸할 때 명색(名色)이 소멸하고, 명색(名色)이 소멸할 때 육입(六入)이 소멸하고, 육입(六入)이 소멸할 때 촉(觸)이 소멸하고, 촉(觸)이 소멸할 때 수(受)가 소멸하고, 수(受)가 소멸할 때 애(愛)가 소멸하고, 애(愛)가 소멸할 때 취(取)가 소멸하고, 취(取)가 소멸할 때 유(有)가 소멸하고, 유(有)가 소멸할 때 생(生)이 소멸하고, 생(生)이 소멸할 때 노사(老死)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멸성제(苦滅聖諦)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인가? 오직 이것,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라고 내가 설한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