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dhammaññūsuttaṃ (AN 7.68-법을 아는 자 경)
7. mahāvaggo n, 4. dhammaññūsuttaṃ (AN 7.68-법을 아는 자 경)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이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 어떤 일곱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을 알고, 의미를 알고, 자신을 알고, 적당량을 알고, 때를 알고, 그룹을 알고, 사람의 높고 낮음을 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법을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경(經), 응송(應頌), 수기(授記-상세한 설명),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問答)의 법을 안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경(經), 응송(應頌), 수기(授記-상세한 설명),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問答)의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기서 ‘법을 아는 자’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경(經), 응송(應頌), 수기(授記-상세한 설명),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문답(問答)의 법을 알 때 ‘법을 아는 자’라고 불린다. 이렇게 법을 아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의미를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것이 이 말의 의미다. 이것이 이 말의 의미다.’라고 각각 그 말의 의미를 안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것이 이 말의 의미다. 이것이 이 말의 의미다.’라고 각각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여기서 ‘의미를 아는 자’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것이 이 말의 의미다. 이것이 이 말의 의미다.’라고 각각 그 말의 의미를 알 때 ‘의미를 아는 자’라고 불린다. 이렇게 법을 아는 자이고, 의미를 아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는 이만큼의 믿음과 계(戒)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와 이해가 있다.’라고 자신을 안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나는 이만큼의 믿음과 계(戒)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와 이해가 있다.’라고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여기서 ‘자신을 아는 자’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나는 이만큼의 믿음과 계(戒)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와 이해가 있다.’라고 자신을 알 때 ‘자신을 아는 자’라고 불린다. 이렇게 법을 아는 자이고, 의미를 아는 자이고, 자신을 아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적당량을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옷과 탁발 음식과 잠잘 자리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들의 수용을 위한 적당량을 안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옷과 탁발 음식과 잠잘 자리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들의 수용을 위한 적당량을 알지 못한다면, 여기서 ‘적당량을 아는 자’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옷과 탁발 음식과 잠잘 자리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들의 수용을 위한 적당량을 알 때 ‘적당량을 아는 자’라고 불린다. 이렇게 법을 아는 자이고, 의미를 아는 자이고, 자신을 아는 자이고, 적당량을 아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때를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지금은 암송할 때다. 지금을 질문할 때다. 지금은 실천할 때다. 지금은 홀로 머물 때다.’라고 때를 안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지금은 암송할 때다. 지금을 질문할 때다. 지금은 실천할 때다. 지금은 홀로 머물 때다.’라고 때를 알지 못한다면, 여기서 ‘때를 아는 자’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지금은 암송할 때다. 지금을 질문할 때다. 지금은 실천할 때다. 지금은 홀로 머물 때다.’라고 때를 알 때 ‘때를 아는 자’라고 불린다. 이렇게 법을 아는 자이고, 의미를 아는 자이고, 자신을 아는 자이고, 적당량을 아는 자이고, 때를 아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그룹을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기는 끄샤뜨리야의 그룹이다. 여기는 바라문의 그룹이다. 여기는 장자의 그룹이다. 여기는 사문의 그룹이다. 거기서 이렇게 다가가야 하고, 이렇게 서야 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이렇게 앉아야 하고, 이렇게 말해야 하고, 이렇게 침묵해야 한다.’라고 그룹을 안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여기는 끄샤뜨리야의 그룹이다. 여기는 바라문으 그룹이다. 여기는 장자의 그룹이다. 여기는 사문의 그룹이다. 거기서 이렇게 다가가야 하고, 이렇게 서야 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이렇게 앉아야 하고, 이렇게 말해야 하고, 이렇게 침묵해야 한다.’라고 그룹을 알지 못한다면, 여기서 ‘그룹을 아는 자’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여기는 끄샤뜨리야의 그룹이다. 여기는 바라문의 그룹이다. 여기는 장자의 그룹이다. 여기는 사문의 그룹이다. 거기서 이렇게 다가가야 하고, 이렇게 서야 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이렇게 앉아야 하고, 이렇게 말해야 하고, 이렇게 침묵해야 한다.’라고 그룹을 알 때 ‘그룹을 아는 자’라고 불린다. 이렇게 법을 아는 자이고, 의미를 아는 자이고, 자신을 아는 자이고, 적당량을 아는 자이고, 때를 아는 자이고, 그룹을 아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사람의 높고 낮음을 아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쌍에 의해 사람을 알아야 한다.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성자를 뵙고자 하고, 한 사람은 성자를 뵙고자 하지 않는다. 이렇게 성자를 뵙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성자를 뵙고자 하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성자를 뵙고자 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정법을 듣고자 하고, 한 사람은 정법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법을 듣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정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정법을 듣고자 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귀를 기울여 법을 듣고, 한 사람은 귀를 기울여 법을 듣지 않는다. 이렇게 귀를 기울여 법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 법을 듣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귀를 기울여 법을 듣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법을 들을 뒤에 명심하고, 한 사람은 법을 들은 뒤에 명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법을 들은 뒤에 명심하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법을 들을 뒤에 명심하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법을 들을 뒤에 명심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명심한 법의 의미를 조사하고, 한 사람은 명심한 법의 의미를 조사하지 않는다. 이렇게 명심한 법의 의미를 조사하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명심한 법의 의미를 조사하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명심한 법의 의미를 조사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실천하고, 한 사람은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렇게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의미를 알고 법을 안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실천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남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고,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도 실천하고 남을 위해서도 실천한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남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비난받고,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도 실천하고 남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점 때문에 칭찬받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쌍에 의해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비구는 사람의 높고 낮음을 아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을만한 분들, 환영받을만한 분들, 보시받을만한 분들, 합장 받을만한 분들이며, 이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